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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

살고자하는 마음 2008. 7. 21. 07:21

저녁식사 한 끼를 먹고 싶을 때 올바른 옷을 입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식당이 있다. 누구든지 만일 그곳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과 다른 옷을 입고 들어가려면 그는 문 앞에 있는 가로막힌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것을 불평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원한다면 자신도 그곳에 맞는 옷을 입고 들어가면 된다. 하지만 그곳에 들어가기 위하여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올바른 옷을 입고 오는 사람이나 시간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런 식당에는 가기 전에 미리 준비하는 것이 옳다.

 

당신은 혹시 청와대나 백악관에 초대받아 들어가 본적이 있는가? 만일 누군가 그곳에 마음대로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지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왕의 자녀들은 그 누구보다도 마음대로 그곳에 들락날락 할 수 있니 이를 불 만족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그것을 당연한 일로 여긴다. 그러므로 자신이 원한다면 자신도 왕자와 공주가 되면 된다.

 

마찬가지로 오직 한 분 신이시요 모든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께서 계신 셋째 하늘에도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두 곳이 있으니 첫째는 ‘거룩한 곳’이라는 의미로 성소(聖所)요 둘째로는 ‘가장 거룩한 곳’ 이라는 뜻으로 지성소(至聖所)라는 곳이다. 이 두 장소를 합하여 성전(聖殿)이라고 하되 그곳에는 오직 거룩한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

 

거룩한 곳에 거룩한 자들만이 들어가는 이유를 비유로 깨달을 수 있으니 아빠는 자녀들이 밖에서 온 몸에 더러운 흙을 묻히고 들어오면 안아주기 전에 먼저 깨끗이 씻으라고 한다. 밥 먹기 전에도 항상 손 씻고 오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불평 불만하는 자녀가 없으니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거하면서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 피를 의지해 자신 안에 있는 그 선악의 죄를 뽑아내고 거룩을 이룬 자들만이 성소와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도 누구나 당연히 여긴다.

 

그 성전은 새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성(城)안에 있으며 거룩한 성인 새 예루살렘은 거룩한 시온산 안에 있다. 그리고 그 성전의 앞부분을 뜰이라고 부른다. 그 성전은 아버지와 아들인 그리스도와 거룩하신 영 세분께서 다른 피조물들을 창조하시기 전에 직접 만드셨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120종과 그 밑의 허다한 종들을 창조하시기 전이다.

 

성소에는 120의 종들 외에는 그 어떤 다른 종들도 들어갈 수 없다. 또한 딸의 권세를 가진 사람들과 그리스도의 신령한 신부 외에는 그 어떤 다른 백성들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바로 성소다. 한편 아버지께서 계신 지성소에는 120의 종들조차 들어갈 수 없으나 그곳에는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얻은 아들들 외에는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으니 이 원칙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을 열면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있는 길이 나온다. 그러므로 그 길을 지나면 다시 문이 나오는데 그 문을 열면 그곳이 바로 지성소이다.

 

아버지께서 계신 지성소로부터 두 가지의 물이 흘러나온다. 그러므로 오른쪽으로는 포도주의 강이 흘러나오고 왼쪽으로는 생수의 강이 나와 성소와 뜰을 지나 셋째 하늘의 구석구석으로 백성들에게 퍼져나간다.

 

그리스도께로 제일 먼저 창조된 120종들 가운데 지성소에 가장 가까이 있는 네 종들이 있으니 그 종들은 네 생물이라고 불린다. 그 네 종은 지성소로 연결된 길로 통하는 성소의 문 앞에 항상 있으며 그 거룩한 문을 붙들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오직 그리스도와 같은 거룩을 이룬 장자들만이 지성소로 들어오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그 네 종들도 그 문을 여는 일을 할 때 외에는 아버지께서 계신 지성소에는 들어가 보지 못한 것이다.

 

장자로 불리는 아버지의 그 아들과 딸들은 셋째 하늘의 모든 영광과 권세를 가지고 있으니 그것으로 인하여 아버지께로 가까이 나가 선하고 거룩한 기쁨을 충만하게 얻는다. 또한 그리스도께로 나누어 받은 아버지의 그 영광을 비취며 셋째 하늘의 백성들을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린다. 또한 아버지께로 거룩한 창조의 물질들을 받아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없는 셋째 하늘을 영원토록 발전시켜 나간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주신 그 신성한 생명을 얻어 아버지의 거룩한 자녀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셋째 하늘의 성소와 지성소의 규모는 마지막에 구원의 은혜를 받은 거룩한 아들과 딸들이 다 함께 모이기에 충분한 크기이다. 그리고 그 크기는 노아에게 지으라고 명하신 방주와 비교할 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때 노아가 만든 그 방주의 크기에서 10배를 하면 지성소의 크기와 같고 성소는 그 지성소 크기의 100배이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성의 뜰의 크기는 사마리아를 제외한 현재 이스라엘나라의 국토와 그 크기가 비슷하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신 것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자는 구원하시고 불순종하는 자는 심판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 전에는 불의와 죄악이 가득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남자와 남자가 여자와 여자가 성적으로 결합했다. 부부간에도 남자가 다른 여자와 여자가 다른 남자와 하는 것을 전혀 부끄럼 없이 여겼으니 그것을 더 이상 죄로 여기지 말자고 하는 지금과 같았다. 또한 아버지와 딸이 아들과 엄마간에도 부끄럼이 없었다. 그러니 아들이 자기 여동생과 누나가 자기 남동생과 하는 것을 부끄러움은커녕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다. 게다가 술 취해 저지르는 죄들은 그럴 수 있다고 여기며 그냥 넘어갔다. 또한 모든 자들이 마음에 오직 돈과 간음과 명예만을 품고 그것을 위해서 살았다.

 

이처럼 당시의 모든 사람들은 양심을 버리고 오직 자신의 기쁨만을 취했다. 또한 자신의 기쁨과 불의를 위하여 죄와 잘못된 일을 행하면서도 오히려 소리를 높이므로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세상을 지켜보시다 그 시대에 그 안에 의인이 하나도 없는 것을 확인하시면 심판을 내리시되 의인은 심판 받는 세상과 함께 사망으로 내려가지 않도록 미리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땅 위에 거하는 첫째 사람들과 둘째 사람들과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네피림과 또한 그 불의하고 죄악된 사람들을 따른 짐승들까지 모두다 물로 멸절시키셨으니 그것이 바로 4000전에 있었던 노아홍수의 심판이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사람으로서 사람을 이해하기에 참으로 어려운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당시 모든 사람들이 죄와 세상에서 마음을 돌이켜 돌아오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누구든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방주에 손만 대어도 그 홍수의 심판으로부터 구해주실 계획이셨다. 그러나 아무리 억수 같은 비가 내리고 또 물이 불어서 차 올라와도 사람들은 방주로 들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처럼 옆집 남자와 여자와 간음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또한 홍수로 먼저 죽은 사람의 집에 들어가 돈을 훔쳤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옆집사람이 홍수에 떠내려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은 저 자와 같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맘놓고 잠을 자다 그날 밤에 죽었다.

 

이와 같이 그때 심판을 당한 모든 사람들은 홍수에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안에 있는 그 죄와 또한 불의한 이 세상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그대로 끝까지 쥐고 있었다. 마치 이러한 말씀들을 읽은 후에 발등에 불이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자기의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에 바쁜 것과 같다. 그 이유는 사람은 그가 누구라도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깊은 바다에서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마음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 마지막 때에도 반드시 이렇게 심판되게 되어있다.

 

반면 거룩하신 영께서는 아버지의 그 뜻과 계획에 따라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는 사람에 대해서는 생명 되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주신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생각에서 돌이키며 자기의 의를 내려놓고 진리를 따라가니 마지막에는 그 거룩한 육체의 생명에 이르게 된다.

 

결국 사람은 그 마음에 따라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망이 좌우된다. 그렇다면 누구는 그 마음이 있고 그래서 생명을 얻고 누구는 그 마음이 없어 사망에 이르는 것인가? 즉 아버지께서는 불공평하신가?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짐승과는 달리 사람에게는 자신의 그 거룩하고 영원한 영을 불어넣어주셨으니 사람은 누구나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을 종과 같은 인격체로 창조하시고 생명과 사망을 모든 사람의 앞에 두신 아버지의 그 계획으로 인하여 자신이 생명을 택할 것인가 사망을 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각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다.

 

예를 들어 노아는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구원을 얻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죄와 불의를 깨닫고 애통했으며 죄와 세상을 미워했다. 또한 자신 스스로가 의롭고 거룩하게 되지 못하는 것을 깨닫고 오직 말씀에 순종하므로 연약함을 인정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눈에 의롭게 보인 그 노아 한 사람으로 인해 그의 사랑하는 모든 가족들도 홍수라는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한 사람이 은혜를 거부하지 아니하고 받으면 그의 가족에게도 그 생명의 은혜가 미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마지막 때를 가만히 보면 불의와 죄악으로 멸망한 그때와 참으로 동일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때에도 사람들의 양심이 없어지고 있으며 모든 일을 자기의 기쁨에만 맞추고 있다. 또한 죄를 지어도 오히려 죄책감이 없이 자랑스럽게 여기며 오직 돈과 간음과 명예만을 구하며 살고 있다. 심지어 그러한 불의와 죄를 늘 범하면서도 그 선악의 죄를 따라 여기저기서 목소리를 높이며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자들도 많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심판이 가까이 왔다는 것은 처처에 일어나는 지진이나 자연적인 재해들을 보면서도 알 수 있으나 이 세상에 가득한 불의와 죄를 보면 더욱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 이러한 세상을 지켜보시다 그 안에 의인이 더 이상 하나도 없을 때 심판을 내리시되 의인은 구원하신다. 또한 한 사람의 의인으로 인하여 온 가족이 구원을 얻게 되는 일도 똑같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에 둘째 하늘을 이끌고 내려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순종하는 자의 가족들을 공중으로 데려가신다. 그것은 그들이 그 동안 세상에서 구별되어 거룩에 애쓰므로 영과 혼과 육의 정결함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동시에 아버지께서는 이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끝까지 생명의 기회를 주신다. 그러므로 거룩한 자들은 모든 나라가 한 나라로 묶여진 곳에 거하는 이 세상의 모든 자들에게 썩어질 육과 사망으로 들어갈 이 세상에서 돌이켜 그 마음을 아버지와 아들께로 드리고 666을 받지 말라는 환난의 복음을 그리스도께서 이 땅으로 내려오시며 심판하시기 전까지 전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3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가짜 평화를 이룬 그 왕에게 목 베임을 당한다. 그러나 아들을 부활시켜주신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위해 죽은 그들에게도 거룩한 육체를 입혀주신다. 그리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은 그가 혼인잔치에서 그리스도와 먹고 마시며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과 제사장으로 다스리며 그 후에 셋째 하늘에서도 그리스도를 따라 아버지께서 계신 그 거룩한 곳으로 들어가 자신이 받은 영광과 권세를 가지고 누리며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휴거 된 자들과 부활에 참여한 자들 외에 거듭나지 못한 세상의 이방인들은 모두다 불의와 죄에 대한 형벌의 심판으로 들어간다. 또한 그가 아버지와 아들을 알고 주여 주여 불렀어도 사망으로 들어가니 그것은 그가 거듭남의 은혜를 얻고도 그리스도를 따르며 아버지의 뜻을 이루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의 생각과 불의하고 죄악된 이 세상을 따랐기 때문이다. 또한 남을 판단하는 그것을 가지고 자신도 같은 일을 행하므로 원수의 그 선악을 끝까지 따랐기 때문이다.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